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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강제노역으로 세운 '종신감옥'엔 일제의 폭압 흔적…

한센인 강제노역으로 세운 '종신감옥'엔 일제의 폭압 흔적…

 

 

 

[역사의 현장을 가다] <9>소록도와 여수 애양원
수호 마사키 취임하며 억압 본격화… 도주땐 감금실行
사회적 격리 넘어 강제로 단종·불임수술 자행하기도
美선교사가 지은 여수 애양원 자발적 입소와 대조적


전남 고흥반도를 향해 당장이라도 껑충 뛰어나갈 듯한 어린 사슴 모양의 소록도. 이 작고 아름다운 섬은 한센인이라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일제 식민권력의 차별과 배제, 감시와 처벌이라는 쓰라린 기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일제 당시 국립 소록도갱생원은 해방 후 국립 소록도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소록도와 고흥 녹동항을 잇는 연륙교인 소록대교가 개통(2009년 3월)되기 전까지 이 섬에는 근 한 세기 가량 한센인들에 대한 '절대 격리'를 내세운 식민권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록도 근현대사의 기점은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한센인 수용지로 결정한 1915년이다. 이듬해 섬 서쪽의 야트막한 언덕 주변에 병원 건물인 자혜의원과 환자들의 숙소가 세워지고 조선 각도에서 한센인들이 실려오면서 규모가 점차 커졌다.

소록도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해는 경기도 위생과장이던 수호 마사키(周防正季)가 제4대 소록도 갱생원장으로 부임한 1933년. 수호는 소록도를 소재로 한 소설가 고 이청준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권력욕에 불타는 주정수 원장의 실제 모델이다. 의사였지만 건축, 설계, 조경에도 관심이 많았던 수호는 취임과 함께 소록도를 "세계 제1의 한센병 요양소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소록도갱생원은 3차례의 대대적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환자숙소, 일주도로, 납골당, 선창, 학교, 아동수용소, 형무소 등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이때 세워졌다. 1916년 100여명이었던 소록도의 한센인 환자는 1940년 무렵 6,000명을 넘어서게 된다.


 

무엇보다 소록도를 찾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소는 섬 중앙부, 현재 국립소록도병원 남쪽 동산에 자리잡은 2만㎡ (약 6,000평) 규모의 중앙공원이다. 삼나무, 팽나무, 종려나무, 팔손이나무 등 잘 손질된 100여종의 관상수와 완도, 금당도 같은 인근 섬들뿐 아니라 일본, 대만 등지에서 가져온 정원석들이 어울려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중앙공원을 비롯한 이 시기의 소록도 역사(役事)들은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어린 강제노동으로 이뤄졌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38년 소록도에 왔다는 김기현(89)씨는 "일주도로를 닦을 때는 새벽 4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했는데 하루 배식은 입으로 후 불면 날아가는 납작보리쌀 두 홉(360g)이 고작이었다"며 "금테 모자를 쓴 일본인 사무장은 야구배트 같은 몽둥이를 들고 우리를 감시하곤 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수호 원장은 중앙공원 정상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을 지나다니는 한센인들로 하여금 절을 하도록 했다. 그는 부임 9년 만인 1942년 자신의 이 동상 앞에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환자 이춘상의 칼에 찔려 최후를 맞는다.

중앙공원 서편으로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악명높은 감금실이 자리하고 있다. 두 개의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돼 있고 건물에는 각각 5~8개의 방이 있다. 좁은 방은 몸을 간신히 눕힐 수 있을 정도다. 물건을 훔치거나 직원을 폭행하거나 신사 참배를 거부할 경우 감금실에 갇혔는데 그 중 가장 중한 사유는 도주였다.

경북 청송 출신으로 1941년 소록도에 온 장기진(89)씨는 "일은 지독하게 시키는데 배는 고프고 치료약도 제때 주지 않아 야음을 틈타 녹동으로 헤엄쳐 도망가려다 물에 빠져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나중에는 아예 녹동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도주자를 잡아와 감금실에 가두곤 했다"며 "그곳에서 얼어죽는 사람도 숱했다"고 증언했다.

일제의 한센병 정책의 본질은 한센인의 사회적 격리가 아니라 '절멸'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도 남아있다. 감금실에서 풀려난 한센인들은 검시실 옆 수술대에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감시실 수감자뿐 아니라 결혼을 하려는 한센인 남성은 모두 정관수술을, 여성은 불임수술을 당했다.

수술대 옆 벽에 감금실에 갇혔다가 정관수술을 받은 한센인의 시가 걸려 있다. 지은이의 이름은 이동이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가 일제의 전체주의적 구료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곳이라면 여수 애양원은 서구 선교사들의 한센인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곳이다. 애양원은 미국인 선교사 포사이트가 1909년 세운 광주나병원을 계승한 한센인 요양병원으로, 1926년 이전해 현 위치인 여수공항 동쪽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터를 잡았다.

강제수용 방식의 소록도와 달리 여수 애양원과 대구 애락원 등 서구 선교사들이 세운 요양시설은 한센인들이 자발적으로 입소하고 자발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인격적인 처우를 한 탓에 선교사들은 이곳에 입소하려는 한센인들의 입원 압력에 내내 시달렸다고 한다.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애양원과 애양교회를 중심으로 환자들의 거주지가 동심원으로 산재해 있는데 이는 이곳이 신앙공동체로 운영됐음을 보여준다. 1934년에는 이 같은 운영에 불만을 품은 반교회 신자들이 애양교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배병심 애양원 역사박물관장은 "1941~45년 일본인들이 잠시 운영할 때를 빼고 이곳에서는 불신자들에 대한 치리(교리에 불복한 이에 대한 책벌)가 있었다"며 "그러나 애양원은 환자들이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소록도와 달리 자발적으로 노동하고 자급자족하는 요양공동체로, 일제의 한센인 정책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3/h201003292240478633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