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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불굴의 한센인, 자립의지 꺾은 건 '사회적 무관심'' 기사 송출

 

불굴의 한센인, 자립의지 꺾은 건 '사회적 무관심'





"(구걸)깡통을 든 우리 손에 삽과 괭이를 들려 달라."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60년대, 30대 중반의 혈기왕성하던 젊은이였던 충광마을 주민 A(82)씨는 마을이 새롭게 거듭나던 시절을 회상했다.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군청에 가서 그렇게 외쳤어요. 이 마을을 우리가 직접 살려 보겠다고."

한센인들의 자립 의지는 당국의 호응을 얻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 한센인 정착사업을 펼치던 때였다. 한센인들을 지리적으로 격리하되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준다는 방침 아래 1950년대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한 한센인 마을을 지원하고 정부 차원에서도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이 정책 방향이었다. 교회 등을 통한 외부 지원과 밭농사, 때로는 구걸로 연명하던 충광마을 주민들은 군청을 방문했던 바로 그날 마을 진입로를 닦고 포장하는 일부터 열정적으로 시작했다고 A씨는 회고한다.

한센인 정착마을이 전국적으로 조성된 배경에는 이처럼 한센인들의 자력갱생 의지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센병 환자는 철저히 격리 수용했던 일제강점기의 그늘이 서서히 걷히고 이 무렵 한센병이 초기 대응으로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입증된 것도 정착마을 확산에 일조했다. 한센인들이 각지에서 양돈, 양계 등 축산업을 일으키면서 89년 기준 전국 돼지고기 공급량의 6.5%, 계란 생산량의 20%를 정착마을이 책임졌다. 이런 호황 덕분에 정착마을 수는 80년대 중반 101개까지 늘었다.

그러나 이후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한센인 정착마을은 동력을 잃기 시작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아 2005년 공개한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는 △88년 서울올림픽 전후 환경 정화를 위한 도심 인접지역 축산업 금지 △90년대 농축산물 시장 개방과 외환위기 △한센인 1세의 고령화 등을 정착마을 쇠퇴의 요인으로 꼽았다. 보고서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정착촌 정책은 90년대 전반기에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지만 정부의 소극적 정책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누적됐다"고 지적했다.


 

이제 주민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에 기대 생계를 이어가고 마을 환경은 방치 속에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정착마을의 현실이다. 자녀 세대 대부분이 외지로 나갔기 때문에 여전히 마을 주축으로 남아있는 한센인 1세대는 고령화, 독거노인 문제 등으로 해결이 요원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1920년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던 국내 한센병 환자 수는 의료 환경의 비약적 발전으로 급감하며 이제 9,000여 명으로 줄었다. 모두가 한센인 정착마을, 나아가 한센인의 존재 자체를 잊히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한센인들은 한센인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정착마을 주민 B(79)씨는 "한센인 1세대가 사라져도 2세대의 삶은 지속되고, 한센병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책임감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 출처 : 한국일보(불굴의 한센인, 자립의지 꺾은 건 '사회적 무관심' (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