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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선종


‘한국인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선종

어머니가 슬퍼하신다며 암투병도 숨겨 달랬는데…

보고싶다는 아이들에게 이젠 천상의 음악 합주를

 

 


14일 이태석(요한) 신부의 부음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있다고는 보았지만 이렇게 쉽게, 이토록 허망하게 가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이날 새벽에 선종한 그의 나이는 불과 48세.

 

남수단 최초 ‘브라스밴드’ 결성…음악으로 마음 치유


저는 7개월 전 그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수도회에서 만났습니다. 45℃가 넘는 열사의 나라 아프리카 수단에서 8년 동안 살다온 그는 수단인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새까맸습니다.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후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광주 가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입회한 의사 출신인 고인은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부터 2008년 11월까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톤즈 마을에서 봉사했습니다.

 

 


이 신부는 톤즈 마을에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 한센병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보살폈으며, 학교와 기숙사를 세워 가난한 어린이들이 자립하도록 도왔습니다. 고인은 20년 동안 200만명이 사망한 내전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남수단 최초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감과 음감을 가진 아이들의 천재성을 발굴해내 큰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뜻밖에 대장암 선고를 받고 국내에 머무르면서 항암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인터뷰를 하기 전에 요구한 게 있었습니다. 자신이 암투병 중이란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노모가 자신의 암투병으로 인해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몸을 돌보지않고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대가’로 얻은 병에 대해 써야만 그의 삶에 대해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음이 분명했지만 저는 그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 암의 그림자가 짙었지만 암투병 사실은 한 줄도 쓸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 외로울까 한때 수도자 꿈도 포기했던 그였건만…

 

고인은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위의 형이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자 자기마저 수도자로 출가하면 어머니가 너무도 쓸쓸해할까 두려워 수도자의 길을 접을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가 아홉살 때 홀로된 어머니는 10남매를 키우느라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대로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남들이 선망하는 의사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가슴 속에서 꿈틀대던 수도자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자의 길로 접어들었고, 아프리카까지 가서 헌신하다가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억장이 무너질 것이 두려워 저에게 그 얘기만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사제가 된 이 신부가 아프리카로 날아간 것은 2001년이었습니다. 그가 도착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한쪽 구석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리고, 쿵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만삭의 임신부가 심한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일단 나무 아래로 그를 옮기고 열명의 여자들이 ‘인간 커튼’을 두르자마자 아이가 나왔습니다. 미사 중에 태어난 아이를 위해 이 신부가 “식기 전에 세례를?!”이라고 농담할 수 있을 때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뒤 그에게 오는 임신부들은 집에서 애를 낳다 순산을 못해 도움을 청하는 이들 뿐이었습니다. 장가도 안 간 그가 그렇게 받아낸 신생아가 무려 수백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는 하루 수십명의 말라리아 환자들, 콜레라로 심한 설사를 하며 탈수돼 심장이 멎어가는 원주민들, 지난 2005년까지 20년 동안 200만명이 사망한 내전으로 팔다리가 잘리거나 가족을 잃어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 등 하나 같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신부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피아노와 기타 등을 즐겨 쳤습니다. 어린 시절 성당에 있는 풍금을 치며 이를 지켜봐주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을 느끼곤 했던 그는 음악으로 전쟁의 상흔이 박힌 아이들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년 전 남수단 최초의 브라스밴드를 만들었습니다.

 

투병중에도 아이들 그리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해

 

그의 청에 따라 한국에서 온 트럼펫과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수많은 악기들의 대부분은 그도 처음 만져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을 가르치자면 그가 먼저 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액의 레슨을 받아도 악기를 다룰까말까하는 한국에선 상상도 안 가는 얘기지만 그는 설명서를 보고 혼자 악기를 익혀서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기적과 하느님의 은총은 이 신부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까막눈의 아이들이 하루 이틀만에 원하는 음을 불어냈고, 이틀 만에 <주 찬미하라>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합주 연습 후 나흘째 되는 날 첫 합주곡을 다같이 연주해 냈다는 것입니다. 수십년 간 울려퍼지던 총성 대신 클라리넷과 플루트, 그리고 트럼펫의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처음으로 울려퍼졌다고 합니다. 연주가 끝난 뒤 아이들은 “총과 칼들을 녹여 그것으로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그 밴드가 대통령이 국빈을 맞을 때 초청공연을 할 정도가 됐으니 ‘주 찬미’가 나오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감과 음감을 가진 아이들은 그야말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천재’들이었다고 이 신부는 미소지었습니다.

 

수단에서 헌신하면서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 병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 남몰래 잠시 한국에 들어온 그에게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매일 “보고 싶다”며 성화 섞인 편지를 보내온다고 했습니다. 검게 그을리고 야윈 이 신부의 눈동자에서 해맑은 아프리카 친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그리며 순진하게 웃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지금 바로 제 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하기만 합니다.

 

이 신부의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 관구관에 마련됐습니다. 장례미사는 16일  오전 8시30분 살레시오 관구관 4층 성당에서 봉헌된답니다. 장지는 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입니다. 02-828-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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